2025고양아티스트 365 선정작가전, 박경의 근작을 중심으로
후각의 전환과 장소의 감각화
_박경의 『Mind Map』과 향기 풍경
1.
서구 미학 전통은 감각의 위계를 전제로 삼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근대 미학에 이르기까지, 시각과 청각은 고차 감각(higher senses)으로, 후각·미각·촉각은 저차 감각(lower senses)으로 간주되었다. 플라톤은 『히피아스 마이오르(Hippias Major)』에서 미의 기준으로 ‘청각과 시각을 통한 쾌락’을 제시하며, 후각은 지나치게 일시적이고 감각적이며 개인적이라 하여 철학적 사유의 대상에서 배제했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이런 감각 위계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고, 여러 미술흐름에서 후각의 위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박경 작가의 작업들 또한 후각을 예술의 전면에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시각문화의 한 지류를 보여준다. 후각은 시각적 중심주의로 구조화된 근대적 미학 체계에서 오랫동안 주변화 되었으나, 작가는 이를 장소성과의 접합을 통해 감각적 정동(affect)과 기억의 작동 양식으로 변환하며 새로운 예술언어를 시도한다.
그의 작업들은 향기를 채집하고 조향하는 방식으로 장소의 정체성과 감정 지형을 구축한다. 후각을 정보 매체가 아닌, 사회적 장소성과 정서적 기억을 인코딩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데, 향을 통해 장소의 ‘물리적 실체’를 넘어 ‘정서적 장소성’을 구성하는 데 초점을 둔다. 따라서 그에게 장소는 경험된 공간이자 감각적, 정동적, 역사적 층위들이 축적된 ‘장소되기(place-making)’와 다름없다.
실제로 박경의 작업은 장소의 후각적 지층(olfactory stratigraphy)을 발굴하는 것에 가깝다. 아이슬란드에서 추출한 9가지 향은 지역의 물리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과 무관하지만 문화적 내러티브와 기억, 생태적 조건까지도 담아내는 감각의 기록물이다. 여기서 향이 지닌 익숙함에 대한 둔감화는 외부자의 시선을 통해 장소의 무의식적 감각을 대리하며, 냄새라는 비언어적 감각은 ‘일상생활의 전술들’ 중 하나로 자리한다. 이때 향은 색채나 질감 못지않은 화면 구성의 주요 요소이며, 물질성에 대한 재해석, 다시 말해 회화의 감각적 층위를 다층적으로 확장하는 장치다.
2.
박경의 회화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식적 특징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조향 회화’라는 것이다. < 마린시티1로 >와 < 필동로 8길 > 같은 작품에서는 향이 포함된 아크릴 안료를 활용한다. 이 조향 아크릴은 냄새를 발생시키는 물질이 아니라, 색채·질감·시간성과 중첩되어 회화적 층위를 형성한다.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멀티센서리(multisensory) 경험으로의 확장이다.
두 번째 특징은 다양한 장소나 시간대를 동일한 화면에 배치하여, 다중적 감각과 기억이 한데 교차하는 구조를 띤다. 작가는 아크릴 안료에 향을 혼합함으로써, 회화의 표면에서 감각이 ‘발산’되도록 한다. 그리곤 작품 제목에 특정 주소나 장소명을 명시함으로써, 회화가 기억된 장소의 정서적 표상으로 기능하도록 한다. 특히 인물과 장소가 중첩된 대형 회화에서는, 냄새뿐 아니라 사람의 체취, 공간의 온도, 군중의 기압까지 시각적 요소로 들어서 있다.
세 번째는 시각예술 내부의 장르적 경계를 넘나드는 동시에, 후각을 회화 내부의 ‘비가시적 요소’로 통합시키며, 감각의 상호작용에 기반 한 새로운 회화적 언어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후각이라는 억압된 감각을 통해 장소의 물리성과 정서성, 사회성과 개인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복합적 양태를 지닌다는 것이다.
마지막 특징은 동시대 예술이 어떻게 ‘시각’ 중심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보다 감각적이며 교차적인 인식 구조를 구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는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회화라고 할 수 있지만 후각이라는 비시각적 감각을 통해 장소와 인간 사이의 감정적·기억적 관계망을 살피는 아카이브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3.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인간과 비인간 요소(여기서는 ‘향’) 간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 네트워크다. 박경 또한 작가, 관객, 조사된 장소, 어떤 시발점이 되는 작업과 같은 다양한 데이터를 네트워크적 요소로 삼되 사진적 재현이나 사실적 묘사보다는 추상화된 공간으로 처리한다. 색면과 구조적 분할을 통해 공간을 평면 위에서 다시 구조화하며, 이는 향이라는 비가시적 매체가 거주할 틈을 제공한다.
일례로 < 그라스(Grasse)의 안나와 아이슬란드의 김종이 >는 발견된 모델과 가상의 작가를 통해 이질적인 두 장소의 정서와 향기를 시각적으로 변환해낸다. 향수 산업의 중심지 프랑스 그라스와 북구 해안 도시 유리프 마을을 병치한 이 작품은 지리적·감각적 병치를 통해, 회화가 어떻게 ‘감각의 지도’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입증한다. 그리고 감각의 지도는 이번 전시 < 엮어, 보아 > 출품작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작 < 부유;자들 >은 2024년 2월 고양시에서 수신한 안전문자를 단초로, 주변 인물과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한 후, 이를 출발점 삼아 보이지 않는 서사를 추상 회화로 치환한 작업이다. 문자라는 일상적 기호가 함축하는 시간적‧공간적 층위는 캔버스 위에서 색과 선, 그리고 기하학적 패턴으로 변환된다. 인물의 연령과 신체 조건에 따라 선의 형태와 밀도는 달라지고, 이러한 선들은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시간의 흐름을 암시한다.
배경은 문자 수신 시각의 상황에 맞춰 무채색 화면으로 구성되어 감정의 여운을 담아내며, 일부 화면에는 향을 머금은 수채 아크릴이 사용되어 존재의 흔적을 투사한다. 나아가 작가는 암광(暗光) 속에서 발광하는 이미지를 도입해 길을 잃은 이들을 위한 은유적 ‘빛’을 제시한다. 이 빛은 낮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스스로 발현되며 ‘잊히지 않음’을 상징한다.
이러한 방식은 박경의 회화가 후각과 시각, 그리고 장소 감각을 교차시키며, 물리적 장소성과 정서적 장소성을 가시화하는 복합적 장치임을 잘 보여준다.■